爾重(이중) 字九卿(구경) 號台石(태석)효종(孝宗) 癸巳(一六五三) 七月十五日生숙종(肅宗) 丙辰(一六七六)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비변랑(備邊郞)·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경력(經歷)·훈련주부(訓鍊主簿)·부정(副正)·사복내승(司僕內乘)·내금위장(內禁衛將)·동중추(同中樞)·부총관(副摠管)·경상좌병 우후(慶尙左兵虞候)·안동영장(安東營將), 온성(穩城)· 장단(長端)· 곡산(谷山)· 평산(平山)의 부사(府使),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경상수사(慶尙水使)·경기수사(京畿水使)·경기좌우병사(京畿左右兵使)·황해병사(黃海兵使)·남병사(南兵使)·북병사(北兵使)를 거쳐 가의대부(嘉義大夫)가 되어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평안병사(平安兵使)·금영천총(禁營千摠)·별장(別將)·중군(中軍), 어영청(御營廳)과 훈국(訓局)의 천총, 중군, 용호장(龍虎將)을 거쳐 춘천겸방어사(春川兼防禦使)에 그쳤다. 공은 문장과 지식이 훌륭하고 논의(論議)가 확실하여 당시 선류(善類)들이 의지한 바가 많았으며 국가의 대사(大事)와 사림(士林)의 시비(是非)를 결정함이 확고하게 바름을 지키셨다. 일찍이 봉산군수(鳳山郡守)로 있을 때 권신(權臣) 유봉휘(柳鳳輝)에게 미움을 받았으며 또 윤증(尹拯)이 그의 스승 송시열(宋時烈)을 배반한 죄를 성토(聲討)하였다가 송성명(宋成明)의 탄핵하는 상소를 입기도 하였다.숙종(肅宗)께서 여러 차례 공의 강직함에 대하여 보상을 하셨다. 공은 나라를 위해서는 강한 자도 두려워하지 않고 정론(正論)을 폈으며 사대신(四大臣)과 협조하여 나라를 부호(扶護)하여 유지하는 데 죽을 힘을 다하셨다. 그래서 저들 반대 당(黨)으로부터 터무니 없이 은자(銀子)의 무함을 받기도 하였고 마음씨가 사대신과 같다는 탄핵(彈劾)을 입으셨다. 보사원종공신(保社原從功臣)에 기록되셨다. 庚子二月十九日 춘천(春川) 임소(任所)에서 卒 墓경기도 파주군(坡州郡) 광탄면(廣灘面) 혜음현(惠蔭峴) 아버지 묘 뒤 미좌(未坐)인데 표석과 상석 망주가 있으며 일구구칠년 사초(莎草)를 다시 하면서 후손 정필(貞弼)이 두레석을 두르는 등 묘역(墓域)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그후 신임(辛壬)의 무옥(誣獄)이 일어나자 충장공(忠莊公) 백시구(白時耉), 충목공(忠穆公) 이상애(李尙?毫?) 충의공(忠毅公) 김시태(金時泰) 등과 함께 관직이 추탈(追奪)되고 재산이 몰수되었다.영조(英祖) 乙巳(一七四九)에 그때 일에 죽은 제공(諸公이 신설(伸雪)될 때 공도 함께 복관(復官)되셨다. 자세한 사실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정언(正言) 홍주익(洪柱翼)이 지은 『성인전(成仁傳)』의 육절도사(六節度使)편에 나와 있으며 『호남절의록』에도 보인다. 족손 상협(相協)이 가장(家狀)을 짓고 성균관 교수(成均館敎授) 이상영(李商永)이 행장을 지었으며 승지(承旨) 김영한(金寗漢)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配정부인(貞夫人) 綾城具氏(능성구씨) 甲午生 丙辰一月六日卒 墓부묘(?超讖?) 父구석(具錫) 祖정랑(正郞) 증승지(贈承旨) 구인중(具仁重) 曾祖현감(縣監) 증참판(贈參判) 구용(具容) 팔곡(八谷) 구사맹(具思孟)의 현손 外祖파평(坡平) 윤확